[특별기고] 보훈의 달인 6월과 상기해야 할 6.25

탑뉴스
[특별기고] 보훈의 달인 6월과 상기해야 할 6.25
  • 입력 : 2022. 06.24(금) 10:16
윤은상(전.광주광역시 교육연수원 총무부장)
6월은 보훈의 달이며 6.25가 발발한지 72주년이 되었던 달이다.

대선과 지선을 통해서 정치인들은 앞 다투어 5.18과 봉화마을은 방문하면서 정치적인 이벤트를 하였으나 6.25 희생자나 천안함, 연평 해전 희생자에 대한 예우는 상대적으로 홀대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산화한 전몰 유공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기억하는 보훈의 달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는 베이버부머 세대로 6.25 전후의 전란이 어느 정도 복구되어가는 시기에 태어났다.

6.25 전후에는 남북한이 대치한 세대로 6.25를 일깨우는 행사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당시에는 반공 표어, 포스터, 웅변대회와 교육을 통해서 국가관을 확립하고 북한과의 대립 국면을 심화시켜 왔다.

지금은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 관심도 없고 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도 한마디의 사과 없이 사망하여 잊혀진 전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진보적인 전교조 쪽에서는 북한을 선진국인 것 같은 발언을 하거나 평양을 세계 제일의 전원도시, 계획도시라고 아이들 교재로 내놓았는데 공산주의 사상으로 세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김일성 3대 정권이 무너져야 하며, 6.25의 책임도 물어야하고,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되어 있는 납북 가족들, 국군 포로, 중국의 성노예로 팔려가는 탈북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잊혀진 6.25를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해방이후 남북의 각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조선의용군이 북한의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남한에 비해 전투력이 증가되었다. 미국에서 국무장관인 에치슨이 유사시 일본까지만 방어지역으로 하고 대한민국은 제외한다는 에치슨 라인을 선언을 하였다.

북한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월등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침하여 수도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승만은 한강을 폭파하고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대전에서 낙동강까지 밀리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자 맥아더의 인천상육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북쪽으로 밀고 나가 백두산에서 태극기를 꽂으려고 하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하여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1. 4후퇴로 평택, 오산까지 밀리게 되었다.

소련의 제의로 제네바에서 휴전하여 휴전선이 고착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 12만 명의 침공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기적적으로 한국의 편이었다. 미군을 위시한 UN군의 신속한 참전으로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유엔 기구 중에는 안전보장 위원회가 있고, 5개국의 상임이사국이 있다. 상임이사국의 결정은 전원 합의체여서 그 중에서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결정할 수 없는 규정이다.

상임이사국 회의가 소집되고, 당연히 상임이사국 소련이 반대하게 되어 있었는데, 소련이 불참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43개국 대표들이 유엔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었다. 그날 회의에 소련대표 말리크가 왜 불참했을까? 수수께끼지만 이렇게 유엔군이 신속히 참전하여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두 번째의 기적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3일간 서울에서 머무르며 국군에게 3일이라는 황금의 시간을 주어 전선을 정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점이다.

원래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 앞에서 남침을 허락하여 주기만 하면 남조선 전체를 일주일 안에 점령하여 승리를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스탈린은 이 말을 믿고 240대가 넘을 소련 탱크를 위시한 무기를 제공하고 전략 계획까지 세워 주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곧바로 남진하여 부산까지 진격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간을 허비하였다.

3일로 인하여 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유엔군이 파병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첫 선발대가 파병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기적은 남로당 당원들의 자수이다. 남로당 서울시당위원장으로 김일성과 단짝인 박헌영의 뒤을 이은 홍민표가 자수하고, 서울시당 소속 16명의 핵심 간부들을 설득하여 전향케 하고, 이어진 남로당 33만 명들이 자수하여 남한의 공산당 활동이 거의 무너지게 되었다.

네 번째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처음 구상한 것은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된 1950년 6월 29일 이었다.

맥아더는 멀리서 서울을 바라보며 9월19일에 상륙예정일로 하는 크로마이트 작전인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구상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인천항의 조건이 여러 가지로 상륙에 부적합하다고 반대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 한정된 진입로, 인천의 조석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것, 인천은 큰 함정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해안이 없는 점, 요새화 되어 있는 월미도 때문이다.

반대자들은 이런 조건들을 고려하여 군산이나 아산만 상륙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장장 45분에 걸쳐 연설하여 관철하였다. 그는 불가능한 생각을 역이용하여 기습공격에 성공하여 우리 장병 10만 명과 목숨과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률이 오천 분의 일이라 한다.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우리가 입었던 막대한 전쟁의 피해 사실에 대해서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1950.6.25.-1953.7.27 전쟁에서 한국군의 피해는 전사 137,899명, 부상 450,742명, 실종 24,495명 포로 8,343명이 발생했다. 물적 피해도 천문학적이었지만, 전 국토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유엔의 참전국 22개국( 전투 지원국16, 의료 지원국6) 피해현황은 전사 37,902명 부상 103,460명, 실종 3,950명, 포로 5,817명 그 중 미군이 육, 해, 공군 1,789,000명이 참전하여 전사 33,686명 부상 9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이다. 특히 미국이 참전한 연인원 1,789,000명은 광주나 대전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그들은 당시 대한민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지구의 어느 쪽에 위치하고 있는지 조차도 몰랐지만, 나라에서 명령하니 다른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 무려 37,000여명이다.

요즘에는 그런 나라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오직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국땅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그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공산치하에서 자유와 번영 없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값싼 자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그들이 흘렸던 고귀한 피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과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
woman81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