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제자유미술전`출품을 위해 캔버스에 유채화로 그린 `나무와 두 여인` [사진 제공 = 리움미술관]

[여성방송 = 여채영 기자] 강원도 양구군에 가면 '박수근 나무'가 있다. 이 곳에서 태어난 '국민 화가' 박수근(1914~1965)이 자주 그렸던 나목(裸木)을 닮아 그리 부른단다. 실제로 그의 1962년 작품 '나무와 두 여인'에서 정중앙에 자리잡은 나무가 세상으로 나온듯 싶다. 이 그림에는 박수근이 나무만큼 자주 그렸던 아기 업은 여인과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여인이 등장한다. 박수근이 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하려 했던 그림을 도난당한 후 되레 "작품이 도둑을 당한다는 것은 영광"이라며 다시 그려 출품한 작품이다.

▲미군부대 종이박스로 사용된 종이보드에 1952년 그린 유채화 `도마 위의 조기`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전력 사보를 위해 1964~1965년 종이에 색연필, 펜으로 제작된 삽화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이른 첫눈에 울긋불긋 단풍도 거의 다 떨어져 나목들로 변한 지금 박수근 그림과 만나기에 딱 맞는 계절이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과 손잡고 첫 박수근 개인전을 내년 3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연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박수근 유화와 삽화, 판화 등 174점을 모아 역대 최대 규모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박수근 작품은 개인 소장이 워낙 많아서 이 정도 규모 전시를 생전에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판잣집, 1950년대 후반 [사진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특히 유화 7점과 삽화·원화 12점 등 19점은 처음 공개됐다. 이 중에 '마을풍경'과 '산', '세 여인' 등 3점은 '이건희 컬렉션'이다. 지난 2016~2018년 전작도록 발간 사업때 확인된 작품과 자료, 연구성과도 모았다. 전작도록을 통해 실물이 확인된 1962년작 '노인들의 대화'가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건너와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박수근은 화면 전체를 나무 하나로 채우는 과감한 구도와 단순한 형상만으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한편, 창호지와 백자, 초가집 흙벽을 연상시키는 토속적 색감을 겹겹이 그려넣은 마티에르(질감)가 개성적이다. '때무침'이라 일컫는 마른 붓질로 마무리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김예진 학예사는 "작품을 자세히 보면 최소 4~5겹, 최대 22겹 우툴두툴 쌓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기존의 불우한 화가, 소외된 화가라는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새로운 시각에서 재평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설명복숭아, 1950년대 후반 [사진 = 고려대학교박물관]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는 1부 '밀레를 사랑한 소년', 2부 '미군과 전람회', 3부 '창신동 사람들', 4부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구성된다.

박수근은 열두살 때 프랑스 농촌화가 장 프랑수와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자 보통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혀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통해 화가가 됐다. 이북에서 도청 서기와 중학교 미술교사까지 했던 그는 한국전 이후 월남해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 PX(매점)에서 겨우 일자리를 잡았다. 병사들 애인 얼굴을 스카프에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뜻밖의 인연도 만났다.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박완서는 훗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나목'으로 등단해 평범한 주부에서 국민 소설가가 되는 전기를 맞았다.

국내 첫 갤러리 반도화랑을 통해서 미국 사업가와 미군 등 다양한 수집가들과 편지로 교유했던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그가 직접 스크랩한 해외 미술 사조 자료를 보면 밀레나 고흐, 피카소는 물론 잭슨 폴록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계적 추세를 좇았음을 보여준다.

전시에서는 박수근이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한 박완서의 소설 글귀와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함께 배치해 당시를 재현하려 애썼다. 세 사람은 당대 평범함과 성실함이 가지는 삶의 가치를 체현한 인물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한영수의 사진에서는 비참한 현실도 따스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박수근이 보통학교 담임이자 화가의 길을 격려해 평생 연락했던 오득영 선생에게 보낸 판화 연하장에선 인품이 엿보인다. 3부에서 가족들의 생활공간이자 작업실, 전시장을 겸했던 박수근의 창신동 집 대청마루를 배경으로 한 그의 사진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1950~1960년대를 추억하는 노년층을 겨냥해 주요 작품을 1층에 배치한 배려가 세심하다. 2016년 같은 장소에서 관람객 25만976명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렸던 '100년의 신화 이중섭 전' 기록을 깰지도 기대된다.